
중국땅에 20년 가까이 살다보면 주변에 한국어가 많이 서툰 친구들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한국인으로써 한국어에 유창해야된다는것은 당연하지만, 제대로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친구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인생 초등학교 중학교때의 토요일을 주말 한글학교에서 보냈다. 어린 마음에 “내가 한국어를 일상생활에 지장없이 잘 살고 있는데. 왜 배워야되지?” 라고 매번 엄마에게 말했었다. 어떻게서든 나의 금쪽같은 토요일을 빼았기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된 똑똑한 언니가 “내가 한국어를 까먹을 것도 아닌데 뭐하러 한글학교를 다녀?” 라는 말을 듣고 정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거 같아 엄마한테 그대로 전해준 기억이있다. 하지만 대학교 입시를 앞둔 학생으로써 한글학교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중학교때 쯤 일꺼다, 꿈만 같았던 방학을 끝내고 강당을 꽉 채운 친구들 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고등학생 보조 선생님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내가 저 자리에 서보면 어떨까 라는 유치한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리고 나도 이제 KIS에 다니는 고등학생으로써 한글학교 봉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코딩의 ‘코’도 몰랐을때 아이들 컴퓨터반에 보조교사로 베치되었다. 첫 임무는 나름 쉬웠다. 아직 중국어가 서툰 아이들에게 중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의 말을 통역해주는것. 중국어를 다른 친구들에 비해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컴퓨터 쪽 용어를 알아듣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뭐든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행정실 선생님께 아이들 수업 교제를 복사해갔고 매주 금요일 밤에 내일 가르칠 내용을 외우다시피 이해한 상태로 학교를 갔다. 그때부터 중국어 용어등이 귀에 들어왔고 아이들에게 조금더 자신감 있게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나의 첫 컴퓨터 봉사는 간단한 코딩 작업만 가르치는것으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스토리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와 각종 코딩 대회나 로봇 대회를 나가게되면서 내가 배워온 이 문항들을 혹시나 까먹을까 싶어 다시 한번 컴퓨터반 봉사를 하게되었다.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대회를 나가면서 배웠기 때문에 까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무언가를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비로써 그것을 가르칠수도 있어야된다고 아빠에게 수백번 들어왔기 때문이다.

첫날은 처음 코딩을 배우는 친구들을 위해서 아주 기본적인것들을 가르치는 날이였다. 아이들 대부분 한국에 살면서 코딩을 어느정도 배워보았고 들어봤기 때문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몇주간 수업을 하다보니 내용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저번 학기와 같이 교제를 복사해 가면서 미리 예습을 해왔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어려운 중국어를 하는 선생님보다 쉽게 한국어로 설명해주는 나를 더 많이 찾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들어가기 무섭게 아이들은 내 팔을 잡아 당기면서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보조교사를 하면서 정말 뜻깊게 본 아이가 있다.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해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해 이해가 조금은 느린 친구였다. 발음도 조금 어눌했고 서툴어 보였다. 스크래치를 코딩할때 배경을 고르고, 스티커를 고른후 각 스티커에 스크립트를 써내려가야된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그 친구는 알맞는 스티커를 찾는데에 많이 어려워했고, 다른 친구들은 금방 끝낼일을 비교적 어려워하는듯 했다. 나는 내가 어릴때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학교를 다니며 특별 교육을 받던 때사 생각나 되도록이면 이친구에게 많이 다가갔고 도와주었다. 아직도 놀라운게 한 학기 사이에 이 친구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다른 친구들 보다 조금은 늦더라도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주고 하나하나 설명해주니 자신감이 붙었는지 자신감이 붙어 다른 친구들보다 실력이 휠씬 늘었다.
나는 이 친구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이 됬든간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보는게 맞다는것을. 모든 일에 있어서 의지가 부족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이 아직은 부족한 나는, 내가 어떻게 태어났든 무엇이든 끝까지 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어제 졸업한 고등학생으로써 졸업은 결코 끝이 아닌 새출발이라고 생각한다.